그녀가 가지는 남자 친구와의 관계는 어떻게 중독적인 관계로 드러나는 것이며 또한 그 안에 숨어있을 그녀의 자기 결함은 어떠한 것일까. 코헛은 먼저 왜 그녀의 남자 친구들은 모조리 다 그녀로부터 도망쳐버렸는지에 대하여 주목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녀의 사랑하는 대상이었다기보다는 바로 중독의 대상이었고 그들은 아마도 그러한 비인격화된 대상으로 그녀와 가지는 관계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코헛은 보고 있다. 중독자는 매우 강하게 중독의 대상을 필요로 하는 데 중독적인 관계에 있어서 이것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욕구와는 좀 다르다. 중독자는 자기의 중요한 심리적 기능을 대신 수행해 주는 것을 위해서 중독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즉 자기를 달래고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자기의 심리적 기능을 외부로부터 얻기 위함인데, 이는 보통은 자기의 발달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심리구조의 일부로 내면화되어서 스스로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기능이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의 대상은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독립적이고 주도적으로 자신의 욕구와 권리를 가지는 고유한 사람으로서의 대상이다. 이러한 사랑하는 대상은 중독적인 관계에서처럼 상대방의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의존적 대상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보통의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사랑하는 대상 역시 때때로 상대방의 자존감을 유지하는 것을 돕는 기능을 요구받을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수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기능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며 중독의 대상에 대한 욕구에서처럼 그렇게 자주 지속해서 강하게 요구되지는 않는다. 코헛의 분석에 따르면, 그녀에게는 그녀의 남자 친구가 그녀의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바로 그 "사람"으로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그녀를 위해 사용되는 대상(자기대상)의 기능만이 중요했다. 그녀에게는 자기를 안정시키고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한 기능을 하는 남자 친구라는 대상의 존재 "그 자체"가 그녀가 맺는 관계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따라서 이러한 중독적 관계를 통해서 유지될 수 있었을 그녀의 자존감은 그녀의 남자 친구가 떠나버릴 때마다 쉽게 부서졌다. 자신의 자존감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이상화할 만한 타인을 필요로 했던 그녀의 자기애적 욕구는 결국 자신의 심리적 긴장을 조절하고 스스로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러한 기능을 유아기에 돌봄을 주었던 이 혹은 부모(자기대상)로부터 적절한 시기에 점차 내면화할 수 없었던 자기의 발달적 결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째서 그러한 자기의 구조적 결핍을 가지게 되었을까. 우선 코헛의 사례 안에서 부분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그녀의 부모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녀의 부모는 50대의 지성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아빠는 교사이고 엄마는 가정주부였다. 그들 부부는 서로를 사랑했고 그녀의 언니와 남동생과의 사이에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가족에게 있어서 독특한 점은 가족 모두가 타인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특별히 중요시한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여러 봉사단체에 관여하고 있었다. 항상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지 절대로 도움을 받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어릴 때부터 자신을 위해서보다는 타인들을 위한 일들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배우고 몸소 느껴왔다. 어느 날 그녀의 가족은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녀의 다른 형제들은 자신의 짐을 스스로 꾸려서 들고 나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아직 자신의 짐을 남겨두고 나와 있었다. 그때 그녀의 엄마는 그녀에게 스스로 짐을 들고 나가지 않고 다른 식구들이 그녀를 위해서 짐을 들고 나가주기를 바라는 것이냐고 다그쳤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잊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령 "왜 그까짓 것 가지고 나를 비난해요? 난 그냥 잊어버렸을 뿐인데요?"라고 화를 내지고 않았고, "알았어요, 엄마. 얼른 가서 가져올게요. 그래도 너무 심하게 그러지는 마세요."라고 자신을 내세워 말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다만 그녀의 내부에는 '다른 가족들의 일은 도와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자기 일을 도와주기를 바랐을 것'에 대한 깊은 수치심과 자존감의 결여만이 남았다. 그녀의 가족 이야기 중에서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은 그녀 가족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그녀 할머니에 대한 정신적 믿음이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그녀가 태어나기 두 달 전에 돌아가셨지만 늘 그녀의 할머니 얘기를 듣고 자라왔다. 가족들 모두가 할머니에게 헌신적이었고 할머니를 엄청나게 의지했으며 그녀는 할머니에 대한 단 한 번의 불평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가족들은 모두 할머니가 매우 강하고 대단하신 분이라고 믿고 있었고 할머니는 늘 본받아야 하는 가족의 모델이었다. 그녀가 매우 아플 때조차 그녀의 엄마는 이렇게 말하고 했었다. "깨끗한 잠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베개를 똑바로 하고 새로운 책을 읽어라. 제발 바라건대 약한 것처럼 보이지도 말고 다른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말아라. 할머니처럼 강인해져야 한다." 그녀의 할머니가 그렇게 완벽할 리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완벽한 여성으로서의 할머니에 대한 가족들의 그러한 믿음은 그녀의 가족 모두가 옳다고 믿고 있는 신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녀의 주변이나 대학 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은 이러한 그녀 가족의 생활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따라서 그녀는 자기 또래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과 그녀의 부모가 바라는 것들 사이에서 번번이 갈등을 경험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러한 가족들의 기준에 묵묵히 따라야만 했고 이미 그것은 그녀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코헛은 그러한 그녀의 환경이 그녀의 중독적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다 직접적으로 세밀하게 연결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자기애적으로 취약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녀의 부모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의 분석을 통해서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단 그녀가 경험했을 자기애적 상처를 미루어 생각해 볼 때 늘 타인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도와야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가족들의 가치관 속에서 그녀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깊은 수치심을 느끼고 자존감을 상실하고 살아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할머니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에 의존해서 살아왔을 그녀의 엄마가 그녀에게 늘 요구(만)했던 것으로 보이는 이상적인 딸의 모습이 그녀에게 어떻게 작용했을지를 생각해 보자. 그녀는 엄마의 요구처럼 당연히 그렇게 강하고 독립적이며 타인들을 먼저 돌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고 그렇지 못한 것으로 엄마에게 비칠 때 그녀는 극심한 수치심으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자존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엄마가 요구하던 그러한 모습에 그녀 자신이 꼭 부합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녀에게는 어째서 엄마의 이상형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결여된 자존감만이 남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 강하게 되고 독립적으로 사는 것을 배우며 타인들을 돌볼 줄 아는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 확신,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이상을 가질만한 안정감이 자기구조로 잘 내면화되지 못한 까닭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그러한 삶을 사는 데에 필요한 자기 기능들을 스스로 수행할 수 있는 자기구조를 잘 구축하지 못한 탓이다. 이는 바로 그녀의 엄마의 공감적 자기대상의 기능 실패에서 기인한다고 보이는데, 즉 그녀의 엄마는 그녀가 필요로 했던 자기애적 욕구들을 공감적으로 반영해 주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그러한 반영을 통해서 엄마가 기능해줘야 할 것들이 어느 정도의 실패와 좌절을 거치면서 점차 그녀의 자기구조로 내면화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이를 위해서 처음에 블록을 쌓아주지도 않다가 또한 아이와 함께 블록 쌓기를 하면서 아이에게 블록 쌓는 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다가, 그냥 혼자서 처음부터 스스로 블록을 쌓으라고 건네주거나 아니면 아이 혼자 블록을 쌓아볼 기회도 주지 않고 엄마가 혼자서 완성하는 것만 보여주는 것과 같다. 강하고 독립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확신과 안정이 필요한 것인데 마치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확신해주거나 그녀에게 안정을 경험하게 하지도 않고서 엄마 자기 삶만을 보여주면서 그녀 혼자서 스스로 자신감과 안정감을 가지라고 한 것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스스로 자신의 짐을 가져와야 하는 것을 잊었을 때 그녀가 그럴 수도 있다는 자기 믿음을 가지고 자기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스스로 수행할 수 있었다면 그녀가 그토록 자신을 수치스러워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그녀에 대한 자신감과 안정감을 스스로 가질 수 있도록 먼저 그녀를 반영해주고 달래주고 안심시켜주지 못한 그녀의 엄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아플 때조차 그녀를 감싸주고 위로하고 달래주는 대신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강하게 보여야 한다는 엄마의 태도로부터는 자신을 달래고 스스로 안정시킬 수 있는 기능이 그녀에게 충분히 내면화될 기회가 제공되었을 리 없어 보인다.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위한 자기대상의 공감적 기능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의 엄마 자신의 자기애적 상처 때문이 아닐까. 그녀의 엄마는 그녀의 할머니, 즉 자신의 엄마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에 끊임없이 의존하는 태도를 통해서 자기 삶을 지탱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는 아마도 그녀의 엄마의 자기애적 욕구가 자신의 엄마로부터 공감적으로 잘 반영되고 충족되지 못하여 자신의 엄마에 대한 이상화된 이미지가 현실의 경험을 통해서 점차 자신의 구조로 변형되지 못하고 지속해서 환상 속에서만 남아 의존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자기애적 상처를 가지고 있는 엄마로부터는 공감적 자기대상의 기능을 충분히 기대할 수 없다. 코헛은 중독자가 되는 사람들이 자라난 환경을 볼 때 그들의 자기애적 상처는 많은 부분 그들이 엄마를 정말 필요로 하는 시기에 긴장을 잘 조절하게 하는 자기대상으로서의 엄마가 적절하게 기능하지 못한 실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즉 그들은 어릴 때 가령 자기를 잘 달래주고 재워주는 엄마의 따뜻한 사랑의 경험을 점차 잘 내면화하지 못한 경우이다. 코헛의 사례에서의 그 여학생이 정말 원했던 것은 아마도 그녀의 엄마가 자신을 따뜻하게 달래주고 자신을 안심시키며 인정해주고 자신을 믿어 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엄마는 그렇지 못했고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달래고 안심하게 하는 기능이 자기 안에 구조적으로 결핍된 탓에, 그녀가 바랐던 엄마로부터의 위로와 자신에 대한 인정 그리고 확신을 이제는 남자 친구로부터 열망하게 되는 중독적 행동으로 자기의 결함을 나타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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