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적 격노는 때로는 부인되기도 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부인된다기보다는 격노의 형태가 외부로 분출되지 않아서 부인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의 내면 밑바닥 깊은 곳의 상처로부터 드러나는 보복적 격노가 외부 대상에게로 향하지 못할 때 격노는 무의식적으로 억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억압된 격노는 다른 방법과 형태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격노가 격노의 형태를 띠지 않고 표현되는 첫 번째 예는 격노가 일어나는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다. 즉 격노가 치미는 대상 앞에서 자기의 느낌과 생각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내면에 숨어있는 엄청난 상처가 자신에게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그저 부적절한 미소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지나치려 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격노를 적극적인 공격성으로 드러내지 않고 매우 수동적인 공격성으로 드러내는 것도 격노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다른 형태이다. 가령 상대방 앞에서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태도를 가지면서 결국은 그렇게 하지 않거나 자신이 원래 원하던 것을 하고야 마는 태도는 수동적인 공격성으로 격노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이렇게 표현되는 격노의 다른 형태들은 사실 자기의 상처로 인한 격노의 방어적 반응들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격노의 방어적 형태는 격노의 느낌과 감정 자체를 닫아버리고 차단해버리는 또 다른 격노의 형태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자기의 고통스러운 상처에 대하여 반응 자체를 하지 않음으로써 격노로 표출되는 고통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어린 시절 성적 학대를 당했거나 엄마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하는 엄청난 고통을 가진 아이가 격노를 통해서 고통을 호소하지 않고 생각보다 고요한 상태로 있게 되는 경우에는 그러한 방어적 격노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들의 격노 뒤에는 좌절과 우울함이 늘 따르게 된다. 이처럼 자기의 상처로 인한 격노가 외부로 표출되지 못할 때 깊은 좌절과 우울 속에서 그 격노는 자기 자신으로 향할 수 있다. 가령 무엇인가 불편한 정황에서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손톱을 물어뜯거나 하는 아이들의 행동은 아이들의 자기애적 격노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격노는 자기 비난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결국 자기 자신이 격노의 표출 주체이자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애적 격노는 특별히 그것이 만성적인 자기애적 격노로 나타날 때 자기 파괴적인 우울증과 두통이나 고혈압과 같은 신체 증상을 동반할 수 있다. 즉 격노의 초점이 자기 혹은 자기 신체로 향하게 되어 자기의 상처에 대한 격노가 심리 신체적 질병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가령 한국 문화에 독특하게 나타나는 "화병"은 미국 정신의학회의 DSM-IV에 한국 민속 증후군이라는 문화 관련 증후군의 하나로 이미 등록되어 있으며 울화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격노와 관련된 대표적인 심리 신체적 질병이라고 볼 수 있다. DSM-IV-TR에 기술되어 있는 진단에 의하면 화병은 격노 증후군이며 격노를 억제함으로써 발생하는데 그 증상은 불면, 피로, 공황, 임박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쾌감, 소화불량, 식욕부진, 호흡곤란, 빠른 맥박, 전신의 통증 및 윗배에 덩어리가 있는 듯한 느낌 등으로 나타난다. 화병은 깊이 억눌려 있던 분하고 억울한 격노의 감정 때문에 가슴에 무엇인가 덩어리져 뭉쳐있는 답답함이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것과도 같은 증상들을 가지며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매우 급작스럽게 격노가 폭발하기도 한다. 이를 자기애적 장애의 관점에서 보면 화병은 만성적인 자기애적 격노의 한 표현이라고 보게 된다. 즉 자기가 공감적으로 반영 받지 못한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고 싶은 격노가 사회문화적 억압에 의해 표출되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의 상처를 회복하려는 충동이 전면 차단되게 될 때 결국 이러한 격노는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어 그것이 구체적인 신체 증상들을 통해서 화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자기애적 격노는 조각조각 부서진 듯한 자기감, 그리고 무너질 것 같은 자기구조에 대한 무력감의 표현이다. 이는 자기를 건강하게 구축할 수 있는 자기구조에 생긴 어떤 결핍 때문이며 그러한 자기구조의 결핍은 자기대상의 공감적 실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응집력 있는 자기를 형성하지 못한 자기의 취약성이 매우 심각할 때는 특별히 자기 파괴적 충동을 가지게 된다. 즉 자기가 부서진 자기를 경험하게 되면 더는 온전한 자기구조 안에서 유지될 수 없는 그 부서진 자기의 조각들이 이제는 자기에게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괴로움이 되고 그래서 그것들을 제거하거나 없애 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온전히 자기의 구조를 구축할 수 없었던 자기의 부서진 부분들, 그 고통스러운 자기 결함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자기 혹은 자기 신체를 부정하고 거부하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 파괴적 충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충동은 자해나 자살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언젠가 연필로 자기 팔목을 자꾸 찌르는 아홉 살의 아이를 본 적이 있다. 잘 깎여진 뾰족한 연필심으로 피가 날 정도로 자기 팔목을 자꾸 지르는 것이다. 엄마의 염려 속에서 상처들이 다 아물기도 전에 그 아이는 또다시 연필심으로 팔목을 찔러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말투가 어눌하고 하는 행동이 굼떠서 곧잘 아이들의 놀림의 대상이 되었고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울거나 싸우지도 않았다. 결국 "왕따"가 된 그 아이는 옆에 앉은 짝으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는데, 그 아이 옆에 앉은 짝은 시도 때도 없이 그 아이의 팔목을 연필로 찔렀다. 그만하라고 말을 하거나 손목을 슬그머니 감추기도 했지만 아이는 자신이 받는 공격에 대하여 거세게 항의하거나 엄마나 선생님에게 이르지도 않았다. 나중에 상처가 자꾸 생기는 아이의 팔목을 보고서야 자초지종을 엄마가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서둘러 아이를 전학시켰다. 전학 간 학교에서 아이는 이제 따돌림당하지 않게 되었고 연필로 찌르는 폭력도 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이전에 생겼던 같은 상처들이 아이 팔목에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 아이의 팔목에 상처를 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아이는 스스로 자기 팔목을 자신의 연필심으로 찌르기 시작했고 이유를 묻거나 달래도 또 혼을 내도 소용이 없었다. 끊이지 않는 아이 팔목의 상처를 보면서 아이에 대한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아이의 엄마는 미혼모였다. 홀로 아이를 키워내면서 밤낮으로 일해야 했고 게다가 이 엄마에게는 다른 남자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는 어린 시절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키워졌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엄마는 아이만을 데리고 잘 돌보면서 함께 살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살아가려는 와중에 아이 팔목에 상처들이 생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작고 여린 아이는 대체 어떻게 해서 스스로 상처와 고통을 자진해서 주고 경험하며 감수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이 아이가 자기 팔목에 낸 상처를 자기애적 격노의 표현으로서의 자해로 생각해 볼 때, 이는 필경 자신도 기억할 수 없는 그 어떤 상처로 인해 생긴 부서진 자기의 구조적 결함을 없애보려는 파괴적 충동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텅 비어버린 자기의 세계에서 느끼는 절망과도 같은 공허감, 그 안에서 누군가 자기의 팔목에 낸 상처들의 고통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느낌과 위로를 얻게 되며 그 상처들을 누군가가 주지 않게 되자 이제는 스스로 자기가 내는 상처들의 고통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스스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는 부서지는 자기의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며 부서진 자기의 상처를 회복하려는 투쟁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파괴적 충동의 가장 극단적인 표출이 바로 자살이며 이런 의미에서 자살은 온전한 자기구조를 가지고 살아있는 자기로 살고 싶은 가장 강한 욕구가 자기애적 격노의 형태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스스로 자기 귀를 잘라버린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게 될 수밖에 없었던 고흐의 자해와 자살은 그의 삶과 예술 속에서 그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자기애적 상처를 회복하려는 욕구가 고스란히 파괴적 격노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싶다. 대학입시나 성적의 압력으로 인한 청소년의 죽음, 구조조정을 당한 가장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 죽음, 억울함을 호소하고 정의를 외치는 죽음 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살은 너무도 많이 경험된다. 공식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죽음만 해도 강원도 부근에서 연이어 일어나던 동반 자살을 비롯하여 때때로 지속되어오는 연예인들의 자살, 또는 유명인들의 자살, 특별히 우리에게 적지 않게 충격을 주었던 "행복 전도사"로 잘 알려진 최윤희의 자살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많은 죽음의 이유와 내막을 사실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과연 그 가슴 아픈 죽음들을 상황에 따른 비관 자살, 자살 사이트를 통해 조장된 충동 자살, 인터넷 악플로 인한 스트레스나 우울증, 혹은 베르테르 효과 등으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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