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진단적 이해를 통해서 살펴본 바로는 섭식장애에 대한 DSM-IV-TR의 진단기준을 완벽하게 만족시키거나 그 양상들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대상은 결국 여성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고, 실제 통계적으로도 섭식장애는 여성에게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나 많은 남성이 섭식장애를 가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알 수는 없지만 남성의 유병률은 여성의 약 1/10이라 한다. 즉 섭식장애 환자의 90% 이상이 여성이고 주로 12~18세 사이에 많이 발병한다고 알려졌지만 40대와 50대 여성들에게서도 발병하며, 10대의 여성과 젊은 성인 여성의 약 0.5~1%가 섭식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복합적인 섭식장애의 원인을 탐색해보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유병률을 가지고 있는 여성의 섭식장애를 특별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여성의 섭식장애를 단순히 마른 몸매를 매력적인 여성으로 간주하는 사회문화적 기준 혹은 가부장적 시각으로 기술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화 때문만이라고 그 원인을 제한할 수는 없으나, 생물학적이거나 심리적인 다른 복합적 요인들 역시 그러한 사회문화적 맥락과 완전히 무관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회문화적 기준이 여성 섭식장애를 일으키고 가중하는 요인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문화적 설명만으로는 왜 여성이 남성보다 마른 몸의 문화적 기준에 심리 내적으로 더 많이 영향을 받는지, 왜 어떤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보다 더 영향을 많이 받는지, 또한 왜 그러한 영향이 어떤 여성들에게는 섭식장애로 이어지고 다른 여성들에게는 다른 장애들로 연관되는지에 대하여 적절한 답을 제공할 수는 없어 보인다. 따라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가령 여성주의 시각으로 보는 여성의 섭식장애에 대한 관점에 초점을 맞추거나 또는 그러한 관점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문화적 이슈에 내포된 여성 섭식장애 양상들 이면의 심리 역동적 현상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에 주목한다. 특별히 자기의 결핍 관점에서 여성의 섭식장애를 고려해 볼 때, 코헛의 자기 심리학은 자기애적 자기의 발달과정을 제시하는 데에 있어 특별하게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구분 짓는 고전적인 프로이트 심리학의 입장과는 구별된다. 이런 의미에서 Susan H. Sands는 코헛의 이론이 성별 발달의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영향을 훨씬 더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여성의 섭식장애의 가능성을 사회문화적 맥락과 관련하여 발달과정에서 여아가 겪는 특정한 자기의 결핍과 연결하고 있다. Sands는 여아의 자기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결핍의 하나를 바로 거울 자기대상 기능의 결핍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여아의 과시주의를 편협하게 정해진 성적 차이에 근거한 규범 안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적절하게 칭찬해주고 확인해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인데, 이처럼 어릴 때 성장했던 환경 안에서 여아의 과시주의가 반영 받고 확인받지 못했을 때 나중에 섭식장애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아는 자라면서 "숙녀답게(여자답게)" 되는 것을 배우는 동시에 자신을 자신감이 넘치도록 내세우거나 "똑똑하게" 행동하거나 혹은 공격적으로 보이는 것은 억제하도록 교육받는다. Jean Baker Miller에 의하면 여아는 자기 삶을 통해서 자기만의 과시적 욕구가 타인들의 욕구와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다시 배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들의 금지는 여아의 발달 과정에서 갈등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여아가 자신의 과대성을 일반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는 유일한 하나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육체적 외모의 영역이다. 즉 여아는 자기 몸, 의상, 머리카락, 그리고 자신의 미소 등을 과시하도록 배우며 자신이 타인들, 특별히 남성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많이 신경 쓰도록 학습된다. 즉 여아는 지기 몸이 전체적으로 훌륭하게 잘 해내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기 몸을 쓴다기보다는, 자기 몸을 타인이 경탄하도록 내세우는 법을 배운다. 다시 말해서 여성은 자기의 전체 경험 중에서 이러한 특별한 부분(그들의 육체적 외모)만을 과시하도록 격려받아온 것이다. 이는 심하게 왜곡된 거울 반응의 경험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험이 심한 경우 아이는 자기 신체 부분들에 대하여 병리적으로 몰두하게 된다. 부서진 자기 신체의 부분들과 신체적 외모에만 초점을 두는 그러한 신체 과시주의는 신체 자기를 전체 자기구조에 통합시키는 것을 어렵게 하고 수치심을 지속해서 유발하게 되는 근거가 되는데, 이는 바로 섭식장애와 같은 신체적 증상을 통하여 정신 병리로 드러나게 될 가능성이 있게 된다. 또한 여성이 자신의 과시적인 노력을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되고 격려받는 또 하나의 유일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타인을 돌보는 것이다. 여아들은 타인들을 돌보는 가장 가치 있는 "여성적"인 방법의 하나가 바로 타인들을 먹이는 것이라는 것을 생애 초기에 배우며 또한 그렇게 돌보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받고 양육된다. 이는 바로 "먹이는 것"이 여성에게 왜 그렇게 깊은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는 셈이며, 또한 심리적 상처가 있는 수많은 성인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무엇인가를 주기 위한 잘못된 시도로서 왜 음식을 남용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따라서 섭식 장애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은 그 자체가 바로 좌절된 과시주의적 욕구의 표현을 전달하는 도구 혹은 수단일 경우가 많다. 가령 음식을 거부하는 거식에 대한 증상들은 자신이 음식을 먹는(먹지 않는) 것에 대하여 월등하게 잘 조절할 수 있다는 자기에 대한 과도한 자긍심의 표현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폭식의 증상들과 관련하여 음식물을 토해내는 것에 대해서도 유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여아의 자기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또 하나의 결핍은 바로 이상화 자기대상 기능의 결핍과 관련한다. 여아들이 현대 사회에서 양육되면서 가지는 두 번째의 문제는 남아들과 비교해 볼 때 이상화 자기대상의 기능을 제공할 수 있는 인물들이 여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엄마로부터 그 예를 들 수 있는데, 대부분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엄마에게 아이들 양육이 주어지면서 대부분의 엄마로부터 아이들은 탈 이상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탈 이상화는 여아와 남아 모두에게 외상적일 수 있는데, 특히 여아에게는 같은 여성으로서 엄마가 자신의 일차적이고 가장 주요한 이상화 인물이기 때문에 특별히 더 외상적이 될 수 있다. 첫 번째 탈 이상화는 아이가 15~16개월 정도일 때 경험하는 인식적 변화 중에서 일어나는데, 점점 엄마와 분리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아이의 과대성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엄마에 대해 전지전능함으로부터도 서서히 그 이상화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아이는 극심한 무력감과 우울감을 경험할 수 있다. 엄마에 대한 두 번째 "외상적 환멸"은 가족 환경에서는 존경받는 엄마가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결정적으로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아이가 점차 발견하면서 일어나는데, 아이는 대개 엄마에 대한 그러한 문화적 평가절하를 내면화하게 된다. 이는 주로 여성 자기대상인 엄마 자신이 심하게 자기애적으로 취약할 때 훨씬 더 심각해질 수 있는데, 아마도 자신을 늘 심각하게 깎아내리는 엄마로부터 여아의 이상화 욕구는 좌절될 것이다. 또한 섭식 장애자가 있는 가정에서 아주 종종 볼 수 있는 경우인데, 어떤 엄마는 자기 자신 스스로가 너무 불안하여 자기 딸이 불안을 표현할 때마다 늘 당황해하는데 이는 사실상 딸의 불안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아이는 긴장을 조절하는 데에 있어 만성적인 결핍을 가지게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의 불안 상태를 잘 조율하지 못하는 엄마를 둔 아이는 자신이 필요한 도움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을 곧 버리게 되고 미숙한 독립성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엄마의 기능을 내면화하게 하는 점진적이고 시기적절한 탈 이상화를 겪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Kim Chernin도 지적하다시피 여성으로서의 자기의 위치와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해서 혼란을 느끼거나 자기의 딸이 가지는 보다 넓은 기회들에 대해서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는 엄마는 이상화하기 어려울 뿐만이 아니라, 딸에게 고통을 가지게 하고 자기가 엄마를 능가함으로 자기 엄마에게 상처를 입힐까 봐 두려워하게 만든다. 따라서 섭식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긴장을 조절하는 것과 관련한 문제를 나타내고 삶의 행위들에서 감동과 의미를 찾을 수 없어 하며 존경의 대상이 되는 타인들에게 과도하게 애착을 두곤 한다. 즉 위로를 주고 편안함을 주는 자기대상 환경으로부터 만성적으로 그러고 외상적으로 실망을 경험하게 되면, 섭식 장애자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이 찾던 편안함과 위로를 주는 대상을 사람이 아닌 외부 대상에서 그 대체물을 찾게 되고 그러한 대체물을 더 신뢰하게 된다. 코헛에 의하면 폭식은 "자기대상(과 그것이 제공하는 변형적 내면화)을 음식(과 먹는 행위)으로 대체하려는 헛된 시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섭식장애는 종종 이상화 자기대상을 대체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즉 음식은 마치 이상화 대상이 하는 기능처럼 전지전능하고 완벽하며 그들을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깊은 고통을 나눌 만큼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을 때 음식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Sands가 지적하는 여아의 세 번째 발달적 결핍이 문제는 바로 엄마가 자기 딸을 자기애적 자기의 확장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장 주요한 돌보는 이가 여성으로서의 엄마이기 때문에 여아는 평생을 남아보다는 훨씬 더 엄마와 심리적으로 연결되어 있게 된다. Nancy J. Chodorow에 따르면 이렇게 엄마와 딸 서로의 일차적 동일시는 점점 더 강해져서 엄마는 딸을 엄마 자신의 확장으로 경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엄마 자신이 자기애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자기애적 확장을 해야 하는 경우, 엄마는 거꾸로 그러한 자기대상의 기능을 받기 위해서 자기 아들보다는 딸을 사용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실제로 섭식 장애자의 가정에서는 엄마가 딸을 자기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종종 충격적이기까지 한데, 엄마와 딸의 공생적 애착 안에서 딸은 대개 그 엄마에게는 특별한 아이, 즉 그 엄마의 특별한 "절친"으로 되어있다. 그 딸은 엄마의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게 되고, "자기"가 되기보다는 엄마의 자기대상이 되고 만다. 만일 딸이 엄마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발달적 목표를 추구하게 되면, 그녀는 자기 엄마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심리적 온전함이 의존된 자기대상과의 끈이 끊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즉 이는 자신이 상처 입을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자신이 엄마에게 상처 입힐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나타나는데,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거꾸로 자기가 입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엄마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자기대상과의 끈에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이제는 손상된 그 자기대상과의 끈이 "자기"의 온전함에 상처를 입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딸은 자기만의 발달적 욕구와 동시에 엄마의 자기애적 욕구를 채우려는 양자의 강한 욕구 사이에서 해체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섭식장애에서 나타나는 폭식과 구토의 기능은 바로 엄마로부터 심리적으로 분리되지 않고도(폭식) 엄마와 구분되고 있다는(구토) 느낌을 그녀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즉 섭식장애의 증상들은 병리적인 먹는 패턴을 통해서 해체되고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규정하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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