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집력 있는 자기의 발달을 위해서는 자기대상의 공감적 반응이 필수인데 그 공감적 반응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시기적절하게 잘 선택된 공감적 반응이어야 한다. 즉 유아는 엄마가 제공하는 자기대상의 기능들을 경험하게 될 때 그 공감적 반응이 유아의 나이나 상황에 가장 적절하게 유아의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엄마가 자기대상으로 훌륭하게 역할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유아의 발달적 시기와 맞지 않거나 채워지기를 바라는 유아의 욕구에 적절하게 맞물리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대상 최적의 공감적 기능으로 유아에게 경험되지 않는다. 따라서 유아에게 가장 적절한, 너무 과도하거나 너무 모자라지도 않는 엄마의 자기대상 기능이 요구되지만 그렇게 기능해야 하는 엄마의 공감적 반응이 사실상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엄마의 자기대상 기능의 한계가 조금씩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러한 불가피한 공감적 반응의 실패를 유아는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들이 유아에게 절대적으로 해로운 것은 아니다. 코헛에 따르면 자기의 정상적이고 최적의 발달을 위해서 유아는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수준의 좌절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최적의 좌절이라는 경험이다. 이는 자기대상으로서의 부모가 주는 외상적이지 않은 공감적 반응의 실패에서 경험되는데, 바로 자기대상의 공감적 반응의 어쩔 수 없는 경미하고도 시기적절한 실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아가 즉각적으로 원했던 자기대상의 완벽한 공감적 반응으로부터 살짝 벗어난 경험이거나 그 공감적 반응이 잠시 지연된 경험일 수 있다. 가령 유아가 배가 고파 울 때 유아는 불안한 상태에서 자신의 욕구가 즉시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생애 초기에는 아마도 그러한 유아의 욕구들이 비교적 즉각적으로 채워질 수 있었겠지만 먹을 것을 기다리는 불안의 시간을 점차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엄마가 즉각적으로 젖을 물려주거나 우유를 준비해서 먹이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리는데 그동안 들리는 엄마의 달래는 목소리, 엄마가 자신을 들어 올려 안아주게 되는 감각 등을 느끼게 되면서 유아가 경험하는 불안은 아주 경미한 것으로 점점 견딜만한 것이 되고, 드디어 먹을 것이 주어졌을 때 그 불안, 즉 유아가 잠시 경험했던 심리적인 좌절은 사라지게 된다. 이제 유아는 점차 먹을 것이 올 때까지 어느 정도 기다릴 수 있게 되고 그때 가지게 되는 불안은 견딜만한 것이 된다. 그러한 최적의 좌절 경험이 가능하게 되는 것에는 바로 공감적 자기대상의 적절한 반응이 전제되어 있다. 엄마는 이미 유아와 기본적으로 충분한 공감적 유대를 형성하고 있고 또한 유아가 기다리는 동안 유아가 덜 불안할 수 있도록 몸짓과 목소리 혹은 눈빛을 통한 공감적 접촉을 건넨다. 그리고 마침내 먹을 것이 왔을 때 유아는 다시금 엄마의 공감적 반응을 (약간은 불완전하거나 잠시 지연되었지만) 확인하고 안심하게 됨으로써 유아가 가졌었던 심리적 좌절은 외상적인 좌절이 되지 않는 것이다. 즉 유아가 점차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 불안들이 최적의 좌절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선하여 기본적인 공감적 조율이 자기-자기대상 관계 안에서 형성되어야 하며 경미한 좌절의 경험과 다시금 확인하는 공감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유아는 조금씩 현실을 내면화하기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최적의 좌절 경험 속에서 유아는 자신의 현실적 한계나 과대적 환상과 과시적 욕구에 대한 포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며 자신이 이상화했던 자기대상에 대한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게 된다. 결국 시기적절하게 잘 선택된 엄마의 최적 공감적 반응은 유아에게 시기적절한 최적의 좌절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며 그렇게 유아에게 경험된 최적의 좌절은 자기구조의 구축에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엄마는 유아를 위한 최적의 발달 환경을 위해서 유아에게 공감적 반응을 제공하였다가 어느 시점에 되어서는 시기적절하게 좌절을 주어야 한다는 얘기인가. 즉 최적의 발달 환경에 필수적인 최적의 발달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최적의 공감적 반응으로 기능했던 엄마가 어느 순간부터는 태도를 바꾸어 의도적으로 조금씩 좌절을 주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최적의 반응과 최적의 좌절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며 최적의 좌절만이 최적의 발달 조건에 필수적으로 되는 것일까.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결국은 최적의 좌절에 있어 대체 무엇이 "최적"인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코헛은 딱히 이렇다고 하게 정확한 개념으로 답을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코헛은 좌절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최적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최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심리적으로 견딜 수 있을 만한 좌절이라는 의미에서 최적의 좌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며, 그렇게 좌절이 견딜만한 것으로 경험되는 데에는 반드시 최적의 공감적 반응의 경험이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최적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코헛이 말하는 최적의 좌절이란 심리적 발달 과정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대상의 시기적절하게 잘 선택된 공감적 반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일어나는 좌절은 그 자체가 최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구조를 구축해 나가는 발달 과정 안에서 "최적"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코헛이 처음에 도입하게 된 최적의 좌절은 발달적인 맥락에서 자기구조를 구축하게 되는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강조된 것이다. 사실상 코헛은 최적의 좌절이 일어났다는 것 그 자체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최적의 좌절에 의해서 내적으로 경험된 것들과 관련한 발달적 개념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최적의 좌절 경험을 통해서 자기의 심리구조는 어떻게 발달하여 구축되며 그 과정에서 최적의 좌절 경험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점에서 코헛이 최적의 좌절을 도입하게 된 본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그 최적의 좌절 경험은 자기대상으로 기능하는 엄마가 고의로 주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준다" 혹은 "제공한다"라는 의미에 대하여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코헛의 "최적"이란 개념은 자기대상으로서의 엄마가 무엇을 의도적으로 직접 "한다"는 행위의 의미와 그다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의 이론에서 자기구조를 세우는 데에 중요한 자기대상의 공감적 기능이 강조되면서 최적의 공감뿐만이 아니라 최적의 좌절 역시 자기대상의 공감적 역할을 하는 엄마가 "주는" 것으로 대개는 표현된 것이다. 앞서 들은 예에서처럼 유아가 배고파서 울 때, 유아가 젖이나 우유를 먹게 되는 데까지는 어느 정도 기다려야 하는 "좌절"을 조금씩 경험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최적의 좌절을 유아에게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좌절을 주려는 엄마의 의도적인 행위는 들어있지 않다. 더더군다나 배가 고파서 심하게 우는 유아를 일부러 "적절하지 않은" 기간 동안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방치하면서 고의로 "좌절"을 주려는 엄마의 경우가 설마 유아의 발달에 도움이 될 리가 있겠는가. 물론 실제 그런 상황이 지속해서 아주 심각한 경우에는 유아에게 외상적 좌절의 경험이 되며 그것은 자기 병리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최적의 좌절이란 유아의 자기애적 욕구에 대하여 최적의 공감적 반응을 주지 못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엄마의 한계로부터 발생하는 좌절을 뜻하는 것이며 그것은 유아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범위에서 적절한 공감적 반응의 실패이다. 그러한 실패가 유아의 발달에 외상이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유아를 참고 기다릴 수 있게 하며 안심시키게 하는 엄마의 공감적 반응의 경험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헛은 엄마가 유아에게 전폭적이고 완벽한 공감적 반응의 경험을 충분히 제공했다면 경미한 수준의 좌절뿐만이 아니라 약간의 좀 더 심각한 수준의 심리적 좌절의 경험이라도 유아에게 그리 해롭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최적의 좌절에 있어서 그만큼 자기대상의 공감적 기능은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좌절을 "준다"라는 표현은 좌절의 행위적 주체로서의 자기대상에 대한 기술이라기보다는 좌절이 최적으로 경험될 수 있도록 기능하는 자기대상의 공감적 역할에 강조점을 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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